1549년 |
회진출생 |
12월 20일 부침 임진과 모친 남원 윤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. |
1563년 |
15세 |
경주 김씨 대사헌 만균의 딸과 결혼하다. |
1570년 |
22세 |
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세 이후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기 시작하다. 22세에는 속리산 중곡에서 대곡성운(大谷成運)의 문하에 들다. |
1573년 |
25세 |
23세에 모친상을 당해 내려왔다가 대곡성운이 은거한 속리산으로 다시 들어가다. 「중용」을 800번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. |
1575년 |
27세 |
전라감사였던 박계현(灌圉, 1524-1580)을 만나 시편을 서로 주고 받으며 교류함. |
1576년 |
28세 |
중부 풍암공의 상을 당하다. <원생몽유록> <수성지>를 이 무렵에 짓다. |
1577년 |
29세 |
정월에 속리산에서 내려오다. 9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지에 배수되다. 제주목사로 부임 중인 부친을 뵈러 가서 3개월간 유림하고 쓴 제주유람기 <남면소승(南溟小乘)>을 묶어내다. |
1578년 |
30세 |
2월에 제주에서 떠나 3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남원 광한루에 들러 백광훈, 이달, 양대박, 등과 시회를 가진 후에 「용성수창집(龍城輸唱集)」을 펴내다. |
1579년 |
31세 |
고산도찰방(고산은 함경남도 안변)으로 부임하다. 고산도 근방에 있는 가학루(駕鶴樓)에서 양사언, 허봉, 차천로와 함께 시를 짓다. |
1580년 |
32세 |
봄에 북도병마평사로 부임하다. 이 해에 은사 대곡 성운(大谷成運)이 별세하자 <대곡선생제문>을 짓다. |
1582년 |
34세 |
해남현감으로 부임하다. 이 해에 친구 백광훈이 별세하여 만사(輓詞)를 짓다. |
1583년 |
35세 |
평안도 도사(서도병마평사)로 부임하다. 송도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면서 시조 한 수 지었다하여 조정의 비판을 받다. |
1584년 |
36세 |
평안도 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고흥현감으로 부임하다. |
1587년 |
39세 |
6월 부친 절도공의 상을 당하다. 부친이 돌아가신 지 불과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다. |
1589년 |
몰후 2년 |
백호가 생전에 정여립과 함께 항우를 논하면서 '그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을 못한것이 애석하다 하여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렸다'고 한 것이 기축옥사의 빌미가 되어 장지인 임지(林地)가 국문을 당하다. |
1617년 |
몰후 31년 |
백호의 사촌동생 석촌공 임서(林)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목판 4권 2책으로 「백호집」을 간행하다. |